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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노선1
汉昭烈庙 —— 唐碑 —— 刘备殿 —— 文臣廊 —— 诸葛殿 —— 三义庙 —— 惠陵 —— 红墙夹道 —— 三国文化陈列室
参观路线二
汉昭烈庙 —— 唐碑 —— 三国文化陈列室 —— 红墙夹道 —— 惠陵 —— 三义庙 —— 诸葛殿 —— 文臣廊 —— 刘备殿
  • 혜릉
    혜릉은 정원당의 서남쪽에 있으며 능묘 건축은 조벽, 산문, 신도, 침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침전 서쪽엔 “혜릉”이란 두 글자가 쓰여져 있다. “혜릉”은 유비 능묘의 법정 칭호이다. 혜릉 봉토의 높이는 12미터, 둘레의 길이는 180미터이다. 혜릉은 성도 남쪽 교외에 위치해 있으며, 촉한 궁성의 제일 남쪽에 있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혜릉은 부부 3인 합장묘이며, 묘 중에는 유비보다 먼저 세상을 뜬 감부인과 유비 뒤에 바로 세상을 뜬 오부인이 매장되어 있다. 혜릉은 이미 약 1700여 년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단 한번도 도굴 혹은 발굴을 당한적이 없어 그 모습이 현재까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 붉은 담장
    붉은 담장은 혜릉문 앞 양측을 둘러싸고 있다. 이 담장은 숙연한 무후사 중 가장 정감이 넘치는 부분으로, 붉은 담장과 청석노 사이의 이 좁은 길이 1700여 년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군왕에게 통하고 있다. 담장 양측은 붉은 벽이며 밖에는 무성한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붉은 담장의 이 좁은 길은 울창한 죽림 속에 비껴있으며, 2003년 유명한 중국 영화감독 장예모가 성도 홍보영상을 촬영할 때 바로 이 곳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곳은 기념 촬영에 매우 적합한 장소로 인정받고 있다. 길을 따라 걷다가 이 붉은 담장에서 큰 소리로 말하면 뚜렷한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천천히 울려 퍼지다가 사라지는 메아리가 마치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듯 하다. 이 곳에서는 아무리 냉정한 심장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것이 바로 붉은 담장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삼의묘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 내에 있으며 삼의사(三义祠)라고도 하는데, 청조 강희(康熙) 초년 사천(四川) 제독 정교린(郑蛟麟)이 지었다. 건융(乾隆) 49년(1784년) 큰 불에 훼손되었고, 건융(乾隆) 49년 (1787년)에 재건되었으며, 도광(道光) 22년(1842년)에 또다시 전면적으로 보수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건축물과 현판은 주로 도광(道光) 연간의 유존이다. 이 건축물은 혼합구조로서 면적은 569제곱미터이며, 사조오전(四造五殿)으로 그 규모가 매우 방대했다. 그러나 후에 점차 붕괴되어 지금은 소량의 건축물만이 완전히 보존되고 있으며, 1981년 성도시 시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1998년, 제독가에서 원상태로 무후사(武侯祠) 내에 옮겨졌으며, 궁전 내 유관장(劉關張) 조각상 조형은 <삼국연의>의 묘사에 따라 만든 것으로, 형상이 젊고 생기발랄하며 단색 포의를 입고 있어 유관장(劉關張)의 “도화원결의” 후 창업 초기의 형상에 부합된다.
  • 제갈량전

    전당은 널찍할 뿐만 아니라 앞이 탁 트여있어 밝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너비는 5칸, 길이는 2가, 장방형 모양으로 트러스 구조이며 면적은 유비전의 절반이다. 단첨헐산식 지붕에 처마 모퉁이는 위로 치켜올라 있고, 중간에는 화염구슬이 있으며,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갖고 놀고 있다. 또한, 허리 부분에는 미륵불상이 장식되어 있다. 명조의 봉황무늬 사족향로가 대전 앞에 놓여져 있으며, 화구 언저리에는 재물을 가져다 주는 동자가 주조되어 있는데, 그 조형이 매우 생동적이다. 전당 좌우 양각은 각각 종루와 고루이다. 이 대전에는 현판, 주련, 비석 등이 매우 많다.

    제갈량조각상은 신단 내에 있으며, “정원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어 제갈량의 평생의 정조를 보여주고 있다. 조각상은 청조 강희 11년 기원 1672년에 세워졌다. 그는 손에 깃털 부채를 들고 머리에는 두건을 둘렀으며 몸에는 도포를 걸쳤는데, 그 자세가 우아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재상의 품위가 넘친다. 조각상 양측에는 서동이 각각 한 명씩 서 있는데, 한 쪽은 병서를 들고 한 쪽은 보검을 받쳐들고 있다.

    제갈량, 기원 181년 출생, 자는 공명, 낭야 양도 사람, 오늘날 산동 기남지역 출신이다. 기원 207년 유비가 세번이나 제갈량을 찾아가 결국은 그를 산에서 모셔왔다. 208년 동오에 출사하여 손권을 설득해 손, 유 연맹을 맺었으며,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크게 참패시켰다. 유비가 황제가 된 후 제갈량은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기원 223년, 유비는 백제성에서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임종 시 제갈량에게 어린 황태자를 부탁했다. 유선이 황위를 계승한 후 제갈량은 무향후로 임명되어 재상 겸 익주목을 겸했다. 기원 225년 직접 대군을 인솔하여, 5월에 노수를 건너 남방 소수민족의 반란을 평정했다. 기원 227년부터 제갈량은 조위를 북벌하기 시작했고, 유비의 “한실흥복” 유언을 완성하려고 했으나, 과로가 누적되어 기원 234년 마지막 북벌 시 오장원 전쟁터에서 병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향년 54세였다. 제갈량 조각상의 양측에는 그의 아들 제갈첨, 손자 제갈상의 조각상이 있다.

  • 문신무장랑

    유비전 앞의 동서 주랑 내에는 촉한 문신무장의 조각상 28존이 있다. 동랑은 문신랑이라고 하며 작은 봉황이라 불리는 방통을 위수로 총 14명의 입상이 있다. 그 중 제갈량에 이어 촉한 군정을 이끈 장완, 외교에 능하고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에 저항하는데 공을 세운 비의, 그리고 제갈량에게 감히 상이한 의견을 제기한 동화, 동윤 부자 등이 있다. 서랑은 무장랑으로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조운을 선두로 하여 역시 14명의 입상이 있는데, 맹렬하기로 이름난 마초, 정군산에서 하후연을 참살한 노장 황충 및 제갈량을 따라 수차 병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정벌한 강유 등이 있다. 인물상의 차림새나 의상은 주로 청조의 희곡을 참조했다. 각 조각상 앞에는 모두 인물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유비전

    유비전은 정원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 서 양측의 문신장랑과 남쪽의 2문과 함께 완정한 사합원식 건축을 형성하고 있다. 유비전은 전통적인 단첨헐산식 건축이며, 외관이 7칸으로 비교적 넓직하고 4개의 기둥이 비교적 깊이 박혀있다. 또한, 앞쪽 처마기둥에는 활이 받쳐져 있으며, 채색 도금을 한 길한 짐승 도안이 새겨져 있는데, 제작이 아주 정교하다.

    2문 위에 걸려있는 현판에는 “명량천고”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이는 강희년간의 사천 제독 오영이 쓴 것으로, “명군량신, 천고수범”이라는 뜻이다.

    대전 중앙에는 유비의 조각상이 있는데 전체 사당에서 이 조각상이 가장 높고 크다. 조각상 높이는 3미터이고, 온몸이 금으로 둘러져 있으며, 관면엔 구류가 부착되어 있고, 두 손에는 규를 쥐고 있다. 좌우 시자들은 한 손에 옥새를 들고 한 손에는 상방보검을 받쳐들고 있다. 조각상 앞의 위패에는 유비의 시호 “한소열황제”라는 글이 씌어져 있는데, 이는 당시 군존신비의 등급관념을 충분히 체현하고 있다. 유비는 평생동안 거의 중국 땅의 절반을 돌아다녔지만 발 붙일 곳 하나 얻지 못하고 모진 시련을 겪었다. 그는 수없이 좌절했지만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분투했으며, 결국에는 제갈량 의 보좌에 힘입어 촉한정권을 건립했다. 하지만 황제로 칭한 후 오나라 정벌에 실패했고, 백제성 영안궁에서 병으로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전 양측은 동 서 편전과 연결되어 있는데, 동편전에는 관우 조각상과 그의 아들 관평, 관흥 및 그의 부하 조루, 주창의 배사 조각상이 있다. 서편전에는 장비와 그의 아들 장포, 손장존의 조각상이 있다. 그 중, 주창이 삼국연의 속의 허구의 인물인 것 외에 기타는 모두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이 세 조각상의 공간 배치와 차등 위치의 배치는 모두 고전소설 <삼국연의>중 유, 관, 장이 충성으로 뭉치고 서로를 위하는 군신관계를 체현하고 있다.

  • 당비

    당비의 전칭은 <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이며, 이미 12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헌종 원화 4년(809) 검남 서천 절도사로 부임한 무원형이 27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무후사에 와서 배알할 때, 절도부 장서기 배도에게 명하여 비를 세우게 함으로써, 제갈량에 대한 숭배와 흠모의 정을 표현하고 이로써 후세를 격려했다. 문장이 완성된 후 류공작 이 비석에 글을 쓰고 노건이 이를 새겼다. 문장, 서예, 조각이 모두 뛰어나서 당비는 “삼절비”라고도 불린다.

  • 한 소열묘
    경산식 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을 중심으로 내 외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문을 열면 주홍색 현판에 쓰인 “한소열묘”라는 금빛의 네 글자가 한눈에 보여 숙연한 느낌이 든다. 대문 앞의 좌 우 양측에는 각각 명조의 돌 사자가 하나씩 높여 있어 사당의 위엄을 더해준다. 대문 중축선 밖에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한 채의 조벽이 있다. 조벽 양측의 무성한 용수나무는 충성스러운 병사처럼 사묘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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